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군 위안부 (문단 편집) ==== 피해자 증언의 한계 ====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에 의존해서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을 '구술사학'이라고 한다. 이는 1800년대 남북전쟁이후 미국의 역사학자들이 전쟁이전의 노예제도를 정확히 파악하고자 흑인노예였던 사람들을 인터뷰하면서 만들어진 역사연구의 한 방법론이다. 그러나, 이 구술사학은 증언내용의 진실성을 다 믿을 수는 없다는 비난을 받는다. 구술사학의 문제점을 파헤친 여러 논문이 있는데, 이 논문들에서 피해자가 진실을 말한다고 생각했어도 증언이 사실과 다를 수 있는 이유로 1)오래되어 희미해진 기억, 2)시간이 지나면서 새로 생긴 기억과 혼동, 3)충격적 사건에 의한 기억왜곡 등을 들고 있다. 이후의 사회학연구에서 조사자의 의도대로 증인의 기억이 변화한다는 점이 실험을 통해서 증명되었다. 이 밖에도 증언의 내용에 좌우되는 보상이 있을때 증인이 그 보상을 받기 위해 거짓증언을 할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다만 '보상을 받기 위해 거짓 증언을 할 수 있다'는 이론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은 보상금을 받기 위해 거짓 날조한 것'이라는 일본의 주장과 연결될 수 있는데, 정작 위안부 피해자들은 보상금보다 '정부 차원에서의 피해 사실 인정·사과 및 일본 사회의 반성, 교과서에 관련 사실 기재'를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위안부 피해자 위안부 문제에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기록도 남지 않은 몇 십년 전의 기억에 대해서 정확한 증언을 바라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일부 피해자들은 심각한 [[정신]]적 [[트라우마]]를 겪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정말 끔찍하고 잊고 싶어하는 기억을 몇십 년 동안이나 일 단위로 정확하게 기억해서 증언할 수 있겠는가?([[PTSD]] 문서로.) 생존자들을 상대로 버마나 [[싱가포르]]를 헷갈린다고 공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심지어는 '이남이 피해자'[* [[마산]]에 살던 '이남이 피해자'는 17세이던 1943년 [[일본 경찰]]에 의해 납치되어 성노예로 끌려갔다. [[캄보디아]] 전선에서 일제 패망을 맞았으나 귀국할 방도가 없어 현지인과 결혼하고 캄보디아에서 살면서 [[킬링필드]]의 비극을 또 겪었고 한국어도 잊어버려 1997년 처음 한국 언론에 알려졌을 때는 '훈 할머니'라고 불렸다. 한국인임이 밝혀져 1998년 귀국하고 DNA 검사를 통해 아직 살아있던 여동생을 만났으나 한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캄보디아로 귀국했다가 2001년에 사망했다. [[https://news.v.daum.net/v/20040227042557866|해당 미디어]].]처럼 심한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자신의 본명과 한국어까지 잊어버린 사례도 있다.[* 심지어 [[http://supil.or.kr/essay/talkbox/viewbody.html?partid=29&code=talkbox2&number=40053|카와베 마사카즈마저 위안부 범죄에 관련되었는 말을 하는 분도 계셨다.]] 참고로 말하지만 카와베 마사카즈는 '''[[죽음의 철도]]를 기획하고 만들때 공사도중 포로들이 힘들어하자 당황해하면서 공사를 중지했던''' 사람이다.(그때문에 [[도쿄 전범 재판]]에서 만장일치 무죄 판결받았다.) 게다가 내용을 보면 [[무다구치 렌야|그는 그 부관에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훈장이며, 다음으로는 메마(버마어로 여자)다.라고 말했다는 내용도 있다.]] 당연하지만 저 내용은 '''병사들이 사령관을 조롱하기 위해 만든 내용이지 지 입으로 직접 말했을리가 없다.'''] 실제로 [[홀로코스트]] 추모관의 경우에도 '피해자' 들의 증언을 기반으로 한 사건의 재구성은 명백히 한계를 드러낸 바 있다. 유대인이나 집시들 역시 트라우마가 심해 기억이 없어진 경우는 많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